## 요약 괜찮은데, 무난한데, 더 깊고 절절할 수 있었을 소재를 라이트하게만 그린 느낌. ![[Pasted image 20260204230016.png|400]] 맛있긴 한데, 사실 조선왕조실록 reference가 제일 맛있었어요. 우연히 이동진의 극찬을 접하고 마침 거의 마지막 쉬는 기간이라 곧바로 본 것인데, "이 작품으로 감독님이 많은 걸 누리실 것 같다. 미리 축하드린다"라는 말이 의도한 바를 내가 너무 호들갑 떨며 받아들인 게 아닌가....... ## 👍 개인적으로 정통 사극이 아니더라도 당시의 어조나 행동양식을 정면으로 부숴버리면 화가 나는 편인데, 의도적이든 아니든 현대적인 어구나 말투가 종종 등장함에도 필요한 순간엔 사극에 걸맞는 분위기를 지켜준 것 같다. 한명회와 단종 그리고 매화 역이 특히 그러하다. ## so-so 유머 포인트들이 대단히 재밌거나 기발하지도, 그렇다고 지루하거나 싫증날 정도도 아니다. 익히 일던 유해진 만담 모먼트 맛. 그런 게 마을 사람들과 단종 간의 장면들 외에선 좀 덜어져도 좋았을 것 같다. 가령 엄흥도와 영월 군수의 호랑이 이야기. 여러 인물들의 사정을 장면에 녹여 보여주기보단 유해진의 독백에 맡겨버리는 순간이 꽤 많았는데, 그게 또 아주머니들 푸념처럼 자연스럽긴 해서 싫지는 않다. ## 👎 1 매 장면에서 작자가 의도한 하나의 감정과 생각만 전달하고 그 외의 모든 이야기 요소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듯 지나가려 한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동화의 온도에 머무르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소재의 무게감을 생각했을 때 아쉬운 점. > [!cite]- 그러한 장면들: > - 단종이 엄흥도 및 마을 사람들과 교류하는 과정은 그가 삶의 가치와 원동력을 되찾는다는 근거로 충분하지만, 그와 엄흥도 사이에 대단히 깊은 관계가 형성되는 계기로선 불충분하다. 가령 [[광해]]에서처럼 두 사람이 서로의 내면과 과거를 이해할 충분한 장면이 제시되지 않았다. > - 단종이 엄흥도에게 자신의 탈출을 막지 말아달라 하는데, 그 사실을 관아에 알리는 것이 최소한의 면책 사유라 해도 이미 엄흥도는 호되게 처벌당할 입장이다. 거기에 더해 그를 따라가기까지 하는데,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과 마을 사람들 모두가 죽을 수 있다는 고뇌를 단 한 컷에서도 하지 않는다. > - 이전까진 단종을 위하는 것의 위험성을 체감하지 못했다고 치자. 하지만 이 시점에서 한명회에게 직접적인 경고를 받았고 이미 아들은 말마따나 병신이 되었다. 그런데 "소중하였는가" 한 마디 물음 그리고 애틋한 눈빛만으로 그 모든 고뇌를 대신할 수 있는가? 어디 BL물도 아니고. > - 단종이 포박당하기 전 엄흥도에게 "나를 밀고하였느냐!" 하며 티가 팍팍 나는, 심지어 협력자가 한명회 자신 혹은 영월 군수여야 성립하는 씨알도 안 먹힐 거짓 분노 연기를 보여주는데, 한명회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이후 엄흥도를 처벌하지도 않는다. 엄흥도에게 '그 말대로 그를 배신한 것으로 하겠느냐' 식의 굴복 요구라도 했다면 이후의 전개가 더 납득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같은 이유들로 인해, 제목부터 '왕과 사는 남자'임에도 정작 엄흥도의 고뇌와 결단이 전혀 다뤄지지 않는다. 대신 그런 요소는 모두 단종에게 맡겨졌는데, 사실 단종 또한 주변 인물들이 자신을 따름으로써, 혹은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고민하는 모습을 중요한 순간에 보여주지 않는다. 흔한 영웅담과 거기서 소모되는 주변 인물의 이야기였다면 그래도 되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 👎 2 호랑이 때려잡기처럼 몰입을 방해할 정도로 판타지적인 부분들이 있는데, 그 중 으뜸은 엄흥도의 아들 태산의 존재. 스승도 교보재도 없지만 어릴 때 이미 천자문와 소학을 뗐다는 설정이다. 작중 공부 비스무리한 행동도 보여주지 않는 반면 그의 말투와 단어 선택은 이미 선비의 그것이라서, 보는 내내 이 아들을 특정 시점에 소모시키기 위해 대단히 편리한 설정을 작위적으로 갖다붙인다고 여기게 된다. 작중 적당한 유머를 위해 시대나 인물 설정에 맞지 않는 듯한 어구가 들리기도 하지만, 이 인물이 무려 단종을 감동시킬 정도로 진지하게 포부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희박한 확률"이란 표현을 drop할 땐...... 폭탄이 터져버리는 소리가 난다. 소재와 장르 양면으로 [[관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데, 거기서의 김진형(이종석 분)과 비슷한 역할로 쓰이면 너무나 식상할 것 같아 제발 그러지 않길 바라며 보게 된다. 하지만 웬걸, 엄흥도의 작중 행보에 아들을 위하는 의도는 딱히 엿보이지 않고, 곤장을 맞아 단종의 분노를 일으키는 데에 소비될 뿐이다. 상술한 똑똑이 설정을 억지스럽게 쌓아올린 의미도 없어져버렸다. [[관상]]에서 아비가 아들을 위해 모든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내는 것과 달리, 여기서는 음...... 엄태산을 아예 없애버리고 엄흥도 자신이 고문을 당해도 이야기 진행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 여담 작중 단종이 자신은 영월의 마을 사람들에게 대접받기만 한다며 안타까워하는데, 전에 영월에 가 보니 도시의 제 1 컨텐츠가 단종이었다. 유배지, 왕릉, 단종문화제까지. 상관은 없지만 재미 포인트. 청령포의 관광안내판에 이 엄흥도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었는데,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가 이걸 보고서야 다시 떠올랐다. 한편 이 영화 전체보다 마지막 수 분의 실록 문구가 더 강렬하기도 했다. 이건 이 영화에게 있어 자랑인가 모욕인가.